저 아이 옷을 보니 한 겨울이다. 나도 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저 아이만큼 두꺼운 외투를 입었다. 그 동안 낙엽이 떨어지듯 천천히 기온도 한잎 두잎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아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아침 나올 때부터 추웠다. 하지만 추위를 느끼지는 못했다. 추위를 느끼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출근시간 늦을까봐 발을 재촉하는 직장인은 계절이 가는 속도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계절이 더 빨랐다.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빛의 속도다.
이것은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에 떨어진 낙옆이 아니다. 하루 밤 사이에 떨어진 이 많은 낙옆을 누가 다 치울까. 저녁에 퇴근 길에 보면 다 치워져 있을까?
아침 먹을 때 뒤편 TV에서는 오늘이 수능이라고 한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 가면서 확인한 핸드폰에도 오늘의 소식으로 "수능입실 8시 10분까지"라는 짧은 알림글이 떠 있다. 많은 고3 학생이 오늘만 지나면 공부로부터 해방이다. 어떤 재수생은 오늘을 와신상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또 어떤 학생은 벌써부터 또다른 시작을 준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많은 학생들에게는 오늘이 고생이 끝나는 날이고 이제부터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길 것이다.
오늘 직장에서 한 사람이 휴가를 냈다. 아마 아이가 수능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아이가 수능을 보는데 휴가는 왜 내는 걸까? 입실이 8시 10분까지면 일찍 수험장까지 함께 갔다가 좀 늦더라도 출근 하면 될텐데... 아이가 수험보는 동안 같이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오늘만 휴가가 아니다. 내일까지 휴가를 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 왔다. 많은 잡초속에 묻힌 또 다른 풀처럼 바람이 불 때는 그 풀들을 의지해서 살아 왔고 또 바람이 잦아 들면 다른 풀들에게 햇볓을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 왔다. 학교 입학할 때나 졸업할 때 누가 와서 축하 해 주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아니 그 것이 축하받아야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이가 시험을 본다고 휴가를 낸다고? 그 것도 이틀씩이나? 그렇다고 비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이해를 해야만 한다. 지금 커가는 아이들은 내가 컸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커 간다.
내가 클 때는 한 가족에 적으면 3명 많으면 9명까지도 아이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나왔을까. 며칠 전에 TV광고를 보니 둘을 낳아야 서로 돕고 사는 것을 배운다던가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한다. 언뜻 보면 예전에 둘만 낳자는 것과 지금 둘 낳자는 것이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 다 한명만 낳으려고 하니 이대로 가다가는 50년마다 인구가 반토막이 날 지경이다. 한국 인구가 4천만이라던가. 이대로 100년만 가면 인구 천만시대가 된다. 인구가 4분의 1로 줄어 들면 한사람이 집을 네채씩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자동차도 네대씩 갖고, 차 몰고 다니는 사람 적으면 교통체증도 사라질테니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럼 소는 누가 기를지 그 것이 걱정이 되니 둘을 낳자는 이야기일거다.
지금은 집에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주인공이다. 그 아이가 영순위이다. 그 아이한테 좋아 보이는 것은 모두 해야 한다. 그 아이가 가고 싶은 곳은 아무리 멀어도 가야 하고, 먹고 싶은 것은 아무리 비싸도 사 먹여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구해 주어야 한다. 그 것이 곧 부모의 의무이자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예외가 있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고 싶어 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한다. 부모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고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 이 충돌만 없다면 아이와 부모 둘 다 행복할텐데 불행히도 이 충돌을 없앨 수가 없다. 아이들은 힘들어 하고 이것이 나중에 부모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 어린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궁금해 진다. 저 아이들도 커서 지금의 자기 부모들처럼 애를 하나만 낳아서 또 학원에 보낼까? 저 빨간 외투를 입은 아이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저렇게 혼자 학교에 가는 어린 애는 아마 나처럼 혼자 커 갈 것 같다. 출근 때마다 초등학교 정문을 지나간다. 이때 보면 저렇게 어린 아이가 혼자 등교하는 아이는 많지 않다. 친구와 같이 가거나 아니면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는 자가용을 타고 오는 아이도 보인다.
전철에 몸을 실었다. 오늘 전철은 사람이 많다. 출근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 또 맞췄나보다. 노약자석쪽으로 향한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때는 노약자석 앞이 비교적 한산하다. 한 정거장을 갔을 때 뒤쪽에 있는 전철문이 열리고 이제 막 승차한 아줌마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이리와서 이 거 잡아!"
"헤헤헤..."
동행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아줌마 목소리보다 한참 젊다. 여자가 바로 내 옆 손잡이를 잡는다. 이럴 때 돌아 보면 괜히 얺잖다는 불필요한 오해의 신호를 줄 수 있으니 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좀 얺잖기는 하다. 왜 이리 바짝 붙는 걸까. 손잡이가 바로 다음 손잡이니까 그럴만도 하겠다 싶어 그냥 있는다. 다음 정거장에서 노약자석 세자리중 바로 내 앞에 한자리가 비었다. 여자가 말끝을 흐리면서 말한다.
"여기... 앉으세요..."
"아냐. 빨리 거기 앉아. 빨리 빨리. 괜히 넘어지면 큰일 나."
넘어지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니 환자인가? 여자가 앉았다. 보니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임신한 것으로 보인다.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웃는다. 서로간의 말투로 보아 하니 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사이인 것 같다. 시어미니는 노약자석에 앉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저 시어머니는 나이를 먹었으니 몸이 힘들거다. 그래서 며느리를 앉혀 놓고 몸이 힘드니 고생스러울까? 며느리도 애를 가져서 힘들기는 매 한가지일 거다. 하지만 연신 미소를 머금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말투에서는 힘든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다. 아들 가진 엄마들은 며느리와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다니는 것을 꿈 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정거장 더 가니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앉는다. 나이 먹은 할아버지를 보고 저렇게 기계적으로 일어 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더 젊은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몇 정거장 더 가니 자리가 또 하나 나서 여자가 다시 앉고 머지 않아서 시어머니도 앉았다.
어디를 가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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